이중섭 전시회를 보면서 그에 관한 소개글과 함께 소와 여인, 은종이화, 가족화를 보며 그의 그림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그는 1916년 어렵고 힘든 시기에 태어나 1956년 사망할 때까지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입니다. 1970년대 이후 이중섭에 관한 전시, 영화, 연극, 소설로 제작되어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소개글
이중섭 전시회의 소개글은 그의 1940년대와 1950년대 작품을 대표하는 작품을 모은 것입니다. 1940년대 그림은 1943년부터 1950년까지 일본과 원산에서 유학하면서 그린 것입니다. 이중섭 작가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1950년 12월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중섭은 1937년 일본 문화학원에 입학했습니다. 이중섭은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여러 장의 그림엽서를 그려 보냈습니다. 1940년에 1건, 1941년에 75건, 1942년에 9건, 1943년에 3건을 보냈습니다. 이 그림들은 1979년 미도파 백화점 갤러리에서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이 전시회는 김환기, 문학수, 유영국과 함께 일본 유학시절 활동했던 자유미술가협회의 추상과 초현실주의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당시 이중섭의 작품은 자유로운 공간 구성, 단순한 형태, 원색의 사용, 세련된 선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이중섭의 이 시대의 작품으로 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소와 여인
'소와 여인'은 1943년 제7회 미술작가협회전에 회원으로 출품된 9점 중 하나입니다. 이중섭 전시회의 초기 작품 세계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중섭의 초기 작품들은 대향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아내의 사랑을 종이에 스케치한 것입니다. 이 그림은 선과 색의 조화를 보여주며 초현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소는 이중섭이 즐겨 그리던 소재 입니다. 그림 속 여인은 당시 그의 연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그린 것입니다. 소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인은 입술을 다물고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이 그림은 1940년 12월 25일에 그렸으며 엽서 그림 중 가장 먼저 그린 것입니다. 작가는 먹으로 선을 베낀 후 색칠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이 그림은 엽서화 중에 잘 보존된 그림입니다. 이중섭은 은종이 위에 선으로 스케치하고 그 위에 채색을 했습니다.
은종이화
'은종이화'는 광택이 나는 알루미늄 위에 외곽선을 뾰족한 연필이나 못으로 눌러서 그렸습니다. 그 위에 물감이나 잉크를 문질러 완성한 작품입니다. 선으로 그린 작품들은 그의 삶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중섭은 카페와 술집, 심지어 길거리와 쓰레기통에서도 담뱃갑 속 은종이를 주웠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은종이 그림은 처음부터 접히고 구겨지고 찢어진 상태였습니다. 이중섭 전시회에 출품된 것은 은종이 위에 그림, 가족에게 보낸 편지 그림과 엽서 그림, 스케치, 연필 드로잉 등 많은 작품이 있습니다. 그의 그림은 색과 함께 명확한 선이 인상적입니다. 가족 그림은 은종이 위에 뾰족한 연필을 이용해 눌러서 그렸습니다. 가족을 일본으로 보낸 뒤에 그리기 시작한 수많은 은종이 그림에는 주로 가족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이것은 남에게 보여주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1956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이중섭의 은종이 그림을 소장되었습니다.
가족화
이중섭 전시회에 나온 '가족화'는 화면 주변에 물고기와 게가 등장합니다. 이것을 보면 1952년 가족과 헤어진 서귀포 시절을 회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산에 살던 작가는 한국전쟁이 나자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는 정말 잠시 떠났다가 돌아올 생각에 고향에 모든 작품을 두고 왔습니다. 팔레트 하나만 가지고 갔던 이중섭 가족은 극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잠시 동안 부산에서 살다 1951년 봄 서귀포에 정착했습니다. 서귀포 언덕에 있는 집은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정도로 작았습니다. 적은 양의 배급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 바닷가에서 미역이나 게를 잡아먹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서귀포 바닷가에서 아이들은 물고기와 게를 잡고 발가벗은 채 놀았습니다. 몹시 가난했지만 이중섭은 그곳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1년 후, 이중섭은 1952년 6월 가족을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일본으로 떠나고 홀로 남은 이중섭은 가족의 그리움을 남았습니다. 이중섭은 한국전쟁 이후 소, 가족, 아이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가족과 자녀의 그림이 많아진 것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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